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단 편집) === 위조된 칙령과 무장해제 ===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면서 조선군의 격렬했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3695868|#]]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회선포]] 8정을 압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